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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가 한 참인 인근 시골마을로 귀촌생활이라도 구상해 볼까 싶어 나섰다. 내 깐에는 도심과의 거리도 따지고, 교통 편의성과 발전 가능성 등 여러모로 따져 선택한 조용한 동네로 들어섰다. 그런데 마을입구, 논 한 가운데 커다란 비닐하우스로 나를 이끈다. 닭이나 소, 돼지를 키우는 비닐하우스는 계사, 우사, 돈사라고 해 건축물에 포함 되지만 농작물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는 아무리 규모가 커도 건축법상의 건축물은 아니다. 그러나 안내 받은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서니, 우주공간 같은 큰 틀 안에 15평 정도의 목조주택이 버젓이 세워져 있었다.
2016.12.1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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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건축법 중에 국민편의라는 미명하에 남아 있는 규정이 있다. 면적 단위를 '평(坪)'이라 표현 못하고 제곱미터(㎡) 단위를 사용해야 하며, 건축면적을 계산할 때에 가상으로 없는 공간을 산술적인 면적에는 제외하지만, 공사비를 지불할 때는 면적에 포함시키는 부분이다. 즉 아파트 발코니를 모두 알루미늄 창호로 막아서 쓰니, 분양할 때 기본형에는 설치는 하되 도면에는 표기를 안 하고 공사비를 지불하는 소위 '확장형 발코니'이다. 아파트의 발코니라 함은 거실이나 안방 등 앞에 1-2m 정도의 실외 공간이 있어 상
2016.12.05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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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개인의 재산을 규제하는 '건축법'이 제정되어 비록 자기 땅에 집을 짓지만 적당한 규제를 받아야 한다. 이는 사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의 조건을 제시해 개인의 집이라도 용도에 알맞게 짓고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시작한 관련 법규 중 '제42조 (대지의 조경) 식재(植栽) 기준, 조경 시설물의 종류 및 설치방법, 옥상 조경의 방법 등 조경에 필요한 사항을 정하여 고시할 수 있다'고 되어있어 건물을 준공 할 때는 의무적으로 나무를 심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좁은 대지 사정으로 인하여 옥상조경을
2016.11.21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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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오클랜드는 1840년 대영제국의 윌리엄 홉슨 총독이 식민 정부의 수도로 정하고 영국 초대 해군장관을 지낸 오클랜드 백작(Earl of Auckland)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도시의 면적은 대전의 11배 정도인 6000㎢이지만, 인구수가 150만 명으로 우리와 비슷하여 조직과 운영을 비교해 봄직한 도시이다. 그곳으로 이주해서 살다가 모처럼 10여 년 만에 대전을 방문한 친구가 둔산을 보고 가장 의아해 하는 것이 수많은 광고물이었다. 모처럼 보는 사람의 시선으로는 무엇보다도 광고물이 눈에 띄는 모양이다. 특히, 관이나
2016.11.07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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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이 자랑 할 수 있는 현대사적 가치가 높았던 도서관 2동을 우리는 부셔놓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덤하게 살아가는 지금을 생각해보면 은근히 무기력한 자신을 질책하고 싶다.우남도서관은 1957년 준공한 대흥동 '우리들공원'에 있던 제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1875-1965)의 탄생 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도서관이었다. 1962년 화폐개혁 이전인 1959년에 발행된 100환짜리 동전 앞면에는 국장인 봉황새가 단기 4292년이라는 표기가 있고, 뒷면에 이승만 대통령의 옆모습이 새겨있었다. 또한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마치
2016.10.24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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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Brexit)'가 금년 6월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됐다. 영국이 EU를 탈퇴하기 위해 리스본조약에 따라 이제는 영국 정부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탈퇴 의사를 공식 통지하고 회원국들과 탈퇴협상을 하는 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뉴스로 접하게 될 것이다. 결국 신사의 나라로 알아왔던 영국인들이 일본인과 같이 섬나라의 우쭐하고 옹졸한 근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일례이다. 그런데 당장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권이나 정부에서 실시한 KTX의 노선 결정이나 운영과정을 살펴보면 정부가 대전을 제외시키는
2016.10.10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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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에 있는 백제 원지(苑池)인 '궁남지'는 무왕 때에 궁궐의 남쪽에 만든 연못으로 매년 '연꽃축제'가 열리는 장소이다. 몇 해 전 부여로 고적답사를 갔다가, 연못 한가운데 설치된 분수를 보고 깜짝 놀라서, 곧바로 군청 민원 사이트에 건의 글을 올렸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폭포를, 서양에서는 분수를 좋아하여 동양화에 등장하는 분수가 없듯이 서양화에도 등장하는 폭포는 없으니, 조속한 철거를 바란다고… 동양인들은 자연스럽게 물 흐르는 모습을 선호하고, 고요하게 이를 즐기는 정중동의 자세가 우리 정서이기에, 궁남지에 설치된 분수는 연못과
2016.09.26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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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방과 후에 갈 수 있는 곳이 참 드물었다. 서로 상반된 기능의 장소이지만 도서관과 빵집, 만화방이나 극장이었다. 하지만 '미성년 입장불가'라는 팻말이 눈에 띄는 극장은 선망의 장소지만 비용이 들어 어렵고, 동네에 있는 만화방이나 빵집은 몰래 출입해야 하니까 꺼려지고, 떳떳이 이야기하면서 갈 수 있는 곳은 도서관 뿐 이었다.이런 도서관이 처음 대전에 세워진 것은 일제 강점기에 원동 중앙시장 인근에 있던 시립도서관으로 제법 큰 목구조식 건물로 있었는데, 한국동란 때 불타 없어지고 만다. 이후 1957년 대흥동 우리들공원 자리
2016.09.1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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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정훈의 '노랑 장다리 밭에 나비 호호 날고, 초록 보리밭 골에 바람 흘러가고, 자운영 붉은 논둑에 목매기는 우는고.'라는 '춘일(春日)'이라는 시를 처음 보았을 때, 담당선생님께서 '공설운동장으로 가는 큰 길에서 대흥학교로 가는 길목, 건너편에 약방이 있는데, 이 시를 쓰신 분이 거기에 살고 계시다.' 라는 소리를 듣고 대전에서 시인을 볼 수 있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두리번거렸다.3년 전 쯤, 교과서에 실렸던 바로 그 시(詩)가 대전시청 네거리에 내걸려 있는 모습을 보고, 내심 이젠 대전도
2016.08.29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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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빙글 빙글 도는 '로터리'를 이야기하면, 우선 '라이온스'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다는 국제적인 봉사단체를 떠올린다. 그런데 그 원래의 뜻은 도로에서 원형교차점 즉 회전교차로를 일컫는 말이다. 요즘은 나라에 따라서 우회한다는 뜻의 '라운드어바웃(Roundabout)' 명칭을 더 사용하는 것 같기도 한데, 외곽에서 도심으로 들어서거나 나갈 때 로터리로 반바퀴 돌아서 지나가면 여행하는 느낌이 더욱 신나고, 돌아가는 그 방향으로 전환하는 측면 공간 이동의 멋과 느낌을 배가시킨다.대전에도 60년대에는 대전의 중심도로인
2016.08.01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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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살펴보면, 산업혁명으로 만개한 선진 서양의 문명이 동방으로 뻗기 시작하던 개화기인 1900년대 초에 한국과 중국, 일본에 각각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세 도시를 들자면 중국의 칭다오(靑島), 일본의 삿포로 그리고 우리가 사는 대전이 있다.1898년 독일군이 중국의 자오저우만을 침공하여, 조차권을 얻고 조계지를 설치하여 군항으로 개발을 시작한 칭다오는 '지난'까지 철도를 부설하면서 출발점으로 삼아 무역항으로 발전하였고, 삿포로와 대전은 일본인의 손에 의하여 도시가 계획 되었지만 자국과 식민지라는 점이 서로 달랐다. 삿
2016.07.18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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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미성년 관람불가'라고 표기된 영화를 보려고 가발에 사복으로 위장하고 들어가 보다가 지도교사에게 적발되면 학교에서 징계를 받아, 극장에 가보려는 시도가 무용담이던 시절도 있었다. 조조할인에 2본 동시상영 극장에서 하루 종일 영화만 보고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만 해도 즐거웠던 극장은, 시내 어디에 있었을까? 서울에서 신극이 발생되었던 1908년쯤 대전의 인구는 1만 명 정도로서, 당시 일본연극(가부키)이 대전역전 가설극장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인 집단 주거부락이던 원동에 '대전좌'를 필두
2016.07.04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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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대전의 대중문화 중 나름대로 프로레슬링과 극장 쇼의 흥행이 제법 잘 되던 도시였다. 당시 '박치기 왕' 김일 선수가 오면 만원사례를 이루고, 재개봉관에 극장 쇼가 들어오면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70년대에는 세계타이틀 매치 권투시합이나 국가대표 축구중계가 있는 날이면 다방에 둘러앉아 함께 소리 지르던 때였다. 그러나 그 시절 누구보다 고급스런 의상이나 먹거리 등의 유행을 이끌던 곳은 바로 백화점이다. 근대문화를 메이크업한 이 백화점에는 생활필수품조차 구하기 어려운 시기에 꿈과 사치로 포장된 삶을 우리에게 제시하였고, 문명과
2016.06.20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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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대전역 북쪽 솔랑이(소제동)에는 경치가 중국의 소주(蘇州)에 버금갈 정도 빼어나 붙여졌다는 '소제호(蘇提湖)'라는 호수가 있었다. 폭과 길이가 약300m에 450m나 되는 호숫가에 1905년경 일제는 '신사'를 지어 우암 송시열 고택인 '기국정'의 위풍을 꺾으면서 소제공원을 조성했다. 이후 1927년 성리학의 샘터인 이 호수를 메꾸고, 여기에 철도관사 등 주거지역으로 만들고, 여러 갈래 있던 물길도 바꾸어 지금의 대동천을 만든다. 호숫가에 서로 마주보고 있던 기국정과 삼매당은 가양동으로 변형돼 옮겨지고, '신사'는
2016.05.23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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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대전을 상징하는 건물은 단연 중앙로 네거리에 있는 구시청(삼성화재해상보험 충청본부)으로 1939년도 대전부청사로 세워져 지금까지 견디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스럽다. 옛 충남도청과 대전역를 연결하는 중앙로의 중간 지점인 이곳은 당시 실질적인 상권의 중심으로 건너편에 대전법원(현 NC백화점)과 함께 세워진 관청 건물로, 1935년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준공해 부청사와 대전상의가 함께 사용했다. 1959년 시청을 대흥동 현 중구청자리로 옮기고, 1972년 대전상의에서 전부 매입하여 전면을 큰 수직창 3개로 바꿨다
2016.05.09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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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심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대전천과 대전의 주산격인 보문산(寶文山/457m)은 상징이지만, 이를 어떻게 이용 하냐에 따라 도시의 성장을 촉진시키기 하고, 저해하기도 해왔다. 대전의 지형을 살펴보면 동쪽으로는 대청호, 북쪽으로는 세종시, 서쪽에는 논산을 배경으로 군사도시인 계룡시가 있으며, 그 사이에는 계룡산이 버티고 있다. 시야를 남쪽으로 돌려 금산을 바라보면 보문산이 있다. 대전을 대표하는 인물인 우암 송시열은 보문산을 '누워있는 여인상'이라 하여 인근을 지나갈 적에는 부채로 가리고 지나갈 정도로 산세가 나쁘다 했지만, 정말로 그
2016.04.25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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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대전이 처음 시작할 때엔 86명의 일본인 거류민이 회덕을 피해 대전역 앞에서 좌판을 벌리면서 출발했다. 1932년 충남도청을 새로 짓고, 공주에서 선화동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근대도시로 성장하게 된다.친일부역자인 공주갑부 김갑순(金甲淳)이 기증한 대지 6000평에 충남도청사의 설계는 조선총독부 건축과 소속의 이와스키 센지(岩槻善之)가 시작하였으나, 1931년 사망해 동경제국대학 1년 후배인 사사 게이이치(笹慶一)가 완성했다. 지명입찰을 통해 대전에서 건설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던 스즈키 겐지로(須須木 權次郞)가 수주
2016.04.11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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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전천은 큰 강이 아니라 도시발전에 따라 관심을 받지 못한 느낌이 든다. 이는 물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하고, 대전이 철도의 신설로 인하여 교통도시로 시작한 도시이기에 소극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도심과 연결되는 유일한 소통로인 대전천을 적극 개발하여 친환경적이고, 이상향인 수변도시(Water Front)를 시도하여야 한다. 대전천의 시작은 원도심의 동구와 중구를 가르며 서구, 유성구, 대덕구로 흐르는 대전의 동맥이다. 6,70년대 대전을 대변하던 향토시인인 '박용래'씨가 비오는 날 비닐우산을 한손에
2016.03.28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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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대전은 특별한 건축문화는 없지만, 근래에 2000년대로 세기가 바뀌면서 기간을 정하다보니, 일상 속에 묻혀 있던 생활양식이 획기적으로 바뀌었음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당연한 결과로 알고 있다. 주변 환경에서 큰 변화라고하면 1980년 초 금강을 가로막은 '대청 다목적댐'의 준공이고, 건축분야에서는 2008년에 도심인 대전천을 복개하였던 중앙데파트와 홍명상가를 철거한 것과 1932년 대전으로 옮겨온 충남도청이 80년 만인 2012년에 내포지역으로 이전한 일이다. 대청댐의 혜택으로 시민들이 물 부족의 절실함을 직접
2016.03.14 0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