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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미술관의 소장품 중 대표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대전엑스포'93' 출품작인 백남준의 '프랙탈 거북선'(1993)과 제목처럼 왕관을 쓴 부처의 좌불상이 연상되는 '부다킹'(1997)일 것이다. 천 여 점의 우리 미술관 수집 작품 중 백남준을 먼저 거론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라는 전혀 새로운 현대예술의 계보를 만든 세계적인 예술가이며, 둘째는, 그의 작품 '프랙탈 거북선'이 대전시의 국제적 도시로의 도약에 기여한 때문이다. '프랙탈 거북선'은 '대전엑스포'93' 특별전시에 출품되었고, '대전엑
2019.10.0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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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음악에 대한 담론인 '망양록'편에는 논어 한 구절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이 있다. '양화陽貨' 편의,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한 말인데, 원문은 다음과 같다. '子謂伯魚曰 '女爲周南, 召南矣乎?' 연암은 이를 로 이해한다. 주남과 소남이란 '시경' 국풍(國風)의 첫 머리에 있는 시 두 편을 가리킨다. 필자가 재미있다고 한 것은 연암이 女爲周南(여위주남)의 한 글자 '위(爲)'를 '하느냐?'로 이해한 때문이다. 이에 연암과 대담한 중국의 학자 곡정 왕민호는 '누구도 말하지 못한 독창적인 생각'이라고 극
2019.09.24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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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슬럼프에 빠진다. 지금 이 난관이 두렵고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생각할수록 절망은 큰 고통으로 심장을 짓누른다. 누적된 스트레스도 느끼지 못할 만큼의 숨도 잘 쉬어지지 못할 슬픔을 만났을 때, 우리는 주저앉는다.우리에게 절망이 찾아올 때와 같이 위대한 작곡가들에게도 큰 시련과 절망이 찾아오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작곡가의 마음들이 고스란히 음악에 담긴다. 음악이 우리들의 시련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들의 절망하는 마음을 대변하듯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들이
2019.09.17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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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한 시간 운전해 출근한다. 나의 출근길에는 상습 정체구간이 있다. 그곳에 정차해서 음악을 바꾸고, 물을 마시거나 아침으로 빵을 먹는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사방을 둘러본다. 상습 정체 구간 중 한 곳은 중동이다. 신나게 하상도로를 달리면서 만난 자전거 탄 사람, 울창한 버드나무를 벗어나면 마법처럼 나타나는 곳이 있는데 바로 정 산부인과다.나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아침에는 셔터가 내려와 있어 지금도 영업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창밖으로 싱싱한 꽃이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 꾸준히 관리를 하는 모양이다. 병원 앞에 정차하면 나는
2019.09.1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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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다가온다. 명절에는 유독 가족이 그립다. 누구에겐 어머니, 아버지,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기억으로 마음 든든해지기도 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설치미술가 강서경은 '할머니'를 모티프로 한 작품 '그랜드마더타워(Grandmother Tower)'를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장에 설치하였다. 이른바 ' 할머니 탑'으로 직역되는 작품 '그랜드마더타워'는 둥근 철제 조형물 여러 개를 쌓아 올린 탑의 형태이다. 주로 선형인 원형 조형물은 다양한 색실로 감은 버려진 접시 건조대를 반복적으로 쌓고 결합시킨 것이다. 최소한의 불안과
2019.09.0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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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점에서 책을 세 권 샀다. 세 권 모두 같은 책이었다. 어느 지면에서 '집을 부동산으로 보면 삶이 떠돌이가 된다'는 제하의 인터뷰를 읽고 난 뒤였다. 전에도 인터뷰어인 그 건축가의 책을 읽었고 몇 권을 더 사서 사람들에게 준 적이 있다. 이번에도 한 권은 내가 갖고, 한 권은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 우송하고, 나머지 한 권은 내 친구 노영관 작가에게 주었다. 아, 아니다. 갖고 주다니. 다른 유무형의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책은 존재할 뿐이지 소유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건축가도 집과 삶의 '문화'를 말했으리
2019.08.2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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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연보라 색감의 조명 아래, 작은 무대의 키보드 앞에 어느 재즈 피아니스트가 앉아 있다. 그는 평범한 안경을 쓰고 단출한 옷차림으로, 헤어스타일 역시 단정하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로 밴드의 연주가 시작된다. 재즈 피아니스트는 건반만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연주하고 있다. 그리고 표정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서서히 미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행복한 얼굴로 변화되고 있었다. 그 모습은 TV에서 방영하는 코미디프로그램 혹은 예능채널을 보면서 웃는 표정과는 다르게 보였다. 다른 무언가로부터의 자극에서 시작된 미소가 아닌, 스스로
2019.08.1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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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낭독회 하러 전주에 다녀왔다. 카페 안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시는 L선생님의 초대를 받아 간 자리였다. 선생님과는 2년 전 몽골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함께한 선생님 두 분이 더 참석해주셔서 뒤풀이 자리는 자연스럽게 몽골 후유증으로 이어졌다.L선생님은 여행으로는 좋았지만 몽골에서 살라면 살 수 없을 거라고 했고, 23일에 여섯 번째 몽골 여행을 앞둔 K선생님은 다음 생은 몽골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희망했고, J선생님은 여행은 어디든 좋지요 하면서 소주와 맥주를 말았다.나에게 몽골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을 꼽으라면 사막에 누워 봤
2019.08.12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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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몸살기운에 병원을 찾았다. 오랫동안 가족의 건강을 책임져 주던 의사선생님이 진찰도중 새삼스레 '큐레이터'라는 내 직업이 부럽다고 했다. 선생의 말대로 취미와 직업이 같다는 일은 쉽게 찾을 수 없는 축복과도 같다.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직장인월드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이유는 적성에 맞지 않아도, 직장 내 여러 유형의 갑질을 당해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직장/직업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몇 년 전 어느 여론조사 기관에서 실시한 국내 직장인들의 직업만족도 조사 결과 1위 직업군이 큐레이터였다.학부에서 조
2019.08.0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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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치는 일이 그의 직업이었다. 세간의 말로 고수라고 한다. 북치는 일을 오래하였고, 우리나라 우리 지역은 물론, 유럽의 몇 나라에 그의 북소리를 널리, 크게 울린 사람이었다. 그 사람과의 이야기 끝에 어떤 고수가 되고 싶은가, 물었다. 방송 진행자는 대담자를 앉혀놓고 맹숭한 도덕적 추상화를 그려보여야 할 때가 있다. 소울 아웃된 멘트는 대개 추상에 가깝다. 도덕법칙에 매달려 사는 정의론자나 정치가들이 좋아하는 화법이다.질 들뢰즈는 도덕법칙을 전복하는 두 가지 길을 일러주었다. 원리들로 향하는 상승의 길과 거꾸로 하강하는 길이 그것들
2019.07.29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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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가슴에 손 얹고 큰 호흡을 하면서 무대로 향하는 문 틈 사이로 객석을 바라본다.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저 잘할 수 있겠죠?" 나 역시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감추고 그녀에게 미소를 보이며 애써 괜찮다고 말한다. 마침 그때, 무대감독의 신호와 함께 문이 열린다. 밝은 조명이 눈부시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부터 내가 긴장했었냐는 듯이 자연스레 활짝 미소를 보이며 무대의 정중앙으로 당차게 걸어간다. 기획자인 나는 뒤에서 그녀를 바라본다. 관객들은 큰 박수로 피아니스트를 맞이한다. 박수가 끝난 뒤 흐르는 정적 속에 그녀가
2019.07.2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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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고 몇 개월을 살았다. 내 주업은 글을 쓰는 것인데 시집을 묶고, 발간하고, 새로 입사한 회사에 적응하느라 진이 빠져서 한 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글을 쓰자니 부상 후 필드로 돌아온 선수처럼 영 어색하다."쓰긴 썼는데 이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시 창작 수업에서 만난 분들은 대부분 수줍게 자신의 작품을 내보인다. 마치 틀린 답안지를 내미는 학생의 모습이다. 그리고는 묻는다. "선생님도 안 써질 때가 있어요?" "그럼요" "정말요? 선생님은 등단한 시인이잖아요. 선생님이 쓴 글에 자신 없을 때도 있어요?"
2019.07.1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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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30일, 문재인 대통령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역사상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회동을 가졌다. 이번 회동은 정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 이래 66년 만에 북미 정상의 판문점 만남이었으며, 이것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은 대통령이 됐다. 특히 이날의 3국 정상 회동이 역사적으로 이목을 끌었던 것은 남북미 정상의 사상 첫 판문점 회동임과 동시에, 애초 계획되었던 한미정상 회담 전날인 6월 29일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를 통한 깜짝 제안에 김정은 위원장이
2019.07.0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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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넓히면 그 자체가 한 우주다. 박상륭 선생의 소설 '칠조어론'의 한 페이지에 나오는 문장이다. 마음을 넓힌다. 어떻게 하는 것일까. 결혼 초엽, 열 평짜리 투 룸에서 아내와 함께 살다가, 이 년만에 조금 넓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들을 타향으로 유학 보내고 스물 세평보다 조금 더 넓은 아파트에서 아내와 둘이 산다. 마음을 넓힌다는 건, 이렇게 사는 공간이 넓어지고, 누군가가 자리를 비운 공지가 내 차지가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우주란 무엇인가. 마음이 넓어진 자리가 우주가 된다. 마음과 우주
2019.07.02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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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 없이 시작되었던 칼럼이 벌써 마지막회가 되었다. 야심차게 음악이 도대체 무엇인지 파헤쳐보고자 했던 글들은 결과적으로 일반인들이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그 언저리만 조금 건드려본 형국이 되었다. 그래도 막연히 어렵게만 느껴졌던 음악의 본질에 다소라도 다가갈 수 있었다면 더 할 수 없는 보람이 아닐까 한다. 요즘 우리시대에 많이 들려지는 다양한 음악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음악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살펴보았고 약간 주제에서 벗어났지만 대중음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중음악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재즈음악의 중심요
2019.06.28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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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도시브랜드 학자 Andrew Smith는 메가이벤트의 부정적 기능 또는 패러독스를 '흰코끼리들'(white elephants)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메가이벤트를 유지하는데 고비용이 들면서 충분히 이용되지 않는 시설들을 '흰코끼리들'로 표현한 것이다. 고대 태국의 왕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흰코끼리를 선물했다고 한다. 신하는 왕에게 선물 받은 흰코끼리를 일도 시킬 수 없고, 먹이를 안줄 수도 없어 엄청난 사료비만 축내고 결국 신하는 파산하게 된다. 이것은 자원을 계속적으로 고갈시키는 고비용의 비싸고 불필요한 이벤트 개
2019.06.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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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이 화제다. 우리나라 1세대 디자이너인 아버지의 영향 덕인지 감독 자신은 물론 영화계 안팎에서 '기생충'의 미술적 완성도는 깊은 공감을 얻고 있다.영화와 미술의 친연관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또 하나 있다. 이미 타계 했지만 사회성 짙은 영화 연출로 유명한 할리우드의 영화감독 시드니 루멧(Sidney Lumet)의 영화 '뜨거운 오후(1975)'가 그 예다. '뜨거운 오후'는 1972년 8월, 뉴욕 브루클린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2
2019.06.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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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백낙청은 한국 예술의 '이월가치 단절'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전통이 현대성 안으로 이월되지 못한 점은 한국문화사의 아픈 구석이다. 그러나 생물학의 현상인 '격세유전'(隔世遺傳)은 새로운 영감을 준다. 할머니의 유전자가 어머니를 거치지 않고 손주에게 전달되는 '세대를 격한' 유전 형식은 생태계의 유전자 풀(pool)에 다양성을 가져온다. 물론 문화계승의 양상은 생물학의 그것과는 다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비문화적인 결과론의 토대에서만 '격세문화'가 옹호될 수 있다. 현대성 안에 부활된 전통문화의 유전자만이 생명을
2019.06.18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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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커피를 쓴맛과 단맛을 모두 가진 인생에 비유한다. 갓 볶아낸 커피의 구수한 향에 이끌려 커피를 찾지만, 막상 그 맛은 시고 떫고 쓰다. 하지만 그 와중에 특유의 깊은 맛이 치고 올라온다. 이 향은 중독성이 꽤 커 한 번 맛을 들이면 끊기 어렵다. 커피의 쓴 맛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커피 속 카페인 때문인데,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커피가 위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두뇌는 전쟁터 기마대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마치 기습을 하듯 생각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카페인은 피곤이나 졸음을 야기하는 아드레날린 수
2019.06.11 0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