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현 시인
안국현 시인
미국 선거를 TV로 보면서 우리의 근현대사까지 얘기가 흘러갔을 때 국밥을 뜨던 선배는 말했다.

"전체를 끌고 가려면 어쩔 수 없어. 대를 위해선 희생이 필요했을 테지. 먹고 살게 해 줬잖아?"

나는 소화하기가 힘들었다. 그 `생각`이 끌고 올 풍경들이 서슬 퍼랬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물었다.

"그럼, 형님. 동생이 오늘처럼 국밥 먹고 나가다가 군인들에게 맞아서 뒤통수가 깨져 죽는데도 그리 얘기할 거요?"

지금도 우리가 사는 거리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들`이 부딪치고 있다. 어떤 생각들이 부딪치고 있는 거리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어 고요한 거리보다는 분명 건강한 거리일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권력과 폭력을 이해하지 못한 몇몇 지도자들에 의해 독재와 부패를 지나왔다. 그리고 아직도 진실이 감춰진 어떤 `사건들`이 있다.

사건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이겠지만 진실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했다`일 것이다. 진실은 반드시 질문을 필요로 한다. 왜 그 일이 있어났는지, 왜 그 사람들은 그렇게 했는지. 그래서 질문은 답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어떤 사건은 입을 다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라는 질문은 어떤 걸음들에는 생 전체가 돼버리기도 한다. 그것이 어떤 `생각` 하나가 가져온 결과다. 그러나 그 결과가 결말이 돼선 안 된다. 결과는 새로운 시작을 다시 열 수 있지만, 결말은 끝이기 때문이다. 아직 `왜`에 걸맞은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의문을 가진 자는 아직 끝을 가질 수 없다. 어떤 사건이 입을 열 때까지 걸어야 하고, 진실이 보일 때까지 헤매야 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있다. 어떤 사건이든 진실을 이면으로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문을 가진 자는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더 천착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사건`은 어떤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다. 생각은 생각과 부딪치고 사회를 만들고 사회구조를 만들고 결국에는 우리의 일상을 만든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사회의 억압과 부조리 때문에 죽은 자들이 누리고 싶었던 일상은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냥 때 되면 둘러 모여서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나누면서 웃을 수 있는 일상, 내가 나가고 싶을 때 나갈 수 있고 들어오고 싶을 때 들어올 수 있는 일상, 통제란 오직 자신의 양심과 교양의 깊이만으로 자신이 내리고 싶을 때만 내리는 그런 일상.

나의 선거가 그런 일상을 이루게 한다. 선거는 개인의 생각을 전달하는 행위다. 한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전달하는 것이고 일정한 기간 동안 위임하는 것이라는 `루소`의 생각에 전적으로 나는 동의한다.

더 이상 이 거리에서 권력이 폭력이 돼서는 안 된다. 끝까지 대화와 설득이어야 한다. 나는 그런 권력에 내 주권을 맡기고 싶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히틀러 휘하에서 유대인을 말살하는 데에 `성실`했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을 보며 말한다.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돼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는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생각`은 물방울 하나이고 물방울들이 모여 강은 흘러간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우리의 거리에서 `의사`나 `열사`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사회는 불완전하고 정의롭지 않은 사회이고 그곳에서 하루하루는 끔찍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생각의 깊이가 일상의 깊이를 만든다. 나는 `기억`을 갖고 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에 빠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안국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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