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모 방송의 주말드리마 한 편이 소리없이 막을 내렸다. 고려 말엽 공민왕대를 배경으로 했던 사극 ‘신돈’이다. 세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사료가 빈약한 고려시대를 다룬 것만으로 신선하다는 평가도 없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 ‘보탑실리(寶塔失里)’. 공민왕의 정비(正妃) 인덕황후의 본명이다. 원나라 공주인 그녀는 1351년 볼모로 잡혀 있던 강릉대군을 만나 연경에서 혼인을 했다. 그 해 10월, 강릉대군이 어린 조카 충정왕을 대신하여 왕으로 추대되자 함께 개경으로 왔다.

공민왕의 재위기간은 내우외환의 격변기였다. 홍건적의 발호와 왜구의 침략, 그리고 잦은 역모사건으로 조정은 늘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태기가 없던 공주는 어렵사리 임신을 하여 만삭의 몸이 된다. 공민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해 죄수를 석방하는 특사를 내린다. 하지만 난산 끝에 산모와 아이가 모두 세상을 뜨는 모진 운명을 맞이했다.

반란 중에 기지를 발휘하여 공민왕을 구하기도 했던 보탑실리. 비록 비명에 갔을지언정, 그녀는 한 남자의 지어미로서 행복한 여자였다. 실록에 전하는 것처럼 공주에 대한 공민왕의 총애는 참으로 지극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은 뒤에 절망에 빠진 공민왕은 잦은 정신병적 행동을 보이다가 급기야 측근들에 의해 무참하게 시해를 당한다.

일전에 보탑실리와 깊은 인연을 맺은 한 성씨의 집성촌을 답사했다. 그녀의 호위대장으로서 함께 고려에 왔다가 안음군에 봉해진 ‘서문(西門)’ 씨가 바로 그 후손들. 구전에 따르면 서문 씨 일족은 이성계의 부름을 마다하고 경남 거창의 두메산골에 은거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곳에는 서문 씨가 숨어 살았다는 속칭 ‘서문개바위’가 지명으로 남아 있다.

북녘의 국보급 문화재 수십 점이 서울에 왔다는 낭보다. 그 중에는 국보 중의 국보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이 포함되어 있어 비상한 관심을 끈다. 이로써 남북 문화재 교류의 물꼬가 터진 셈이다. 내친 김에 왕릉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공민왕과 보탑실리의 능으로 가는 답사길도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아니, 벌써 열렸던가?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